대상에서 감각으로: 저것됨이 아닌, ‘이것임’

이미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세계에서 온다. 우리는 자주 상상력(idea, 관념, 의미)이 이미지를 ‘낳는다’ 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상상력보다 이미지가 먼저다. 상상력은 단지 주어진 이미지 사이의 역학 관계를 사후적으로 보충하여 완전하게 할 뿐이다. 이미지는 세계에서 온다. 이미지는 세계가 나의 감각(신체)에 미친 영향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처음부터 감각의 소산이지 이성(관념, 의미)의 소산은 아니다.

감각은 감각함/감각됨으로 나뉠 수 없다. 감각과 감각되는 것(실체, 곧 사물)은 하나로 엮여 있어 쪼갤 수 없다. 이 둘은 신체라는 단 하나의 장소를 가질 뿐이다. 여기서 문형조 작업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대상의 충실한 재현’을 넘어서 ‘감각이 감지한 이미지’를 향해간다. ‘충실한 재현’의 주체가 ‘대상(타자, 외부)’이라면, ‘감각의 감지’의 주체는 감각하는 ‘신체’(자아, 내부)’다. 작가는 “사진의 충실한 재현을 뒤로하고서 바라보는 환경에 ‘끼어드는 무엇’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했다(작가노트). “바라보는 환경”은 ‘이미지가 오는 세계’이고 “끼어드는 무엇”은 그 ‘감각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감각이 감지한 이미지(이하 감각 이미지)는 충실히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감각함으로써 감각되는, 다시 말해서 감각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미지(감각되는 것, 사물)로 포착되는 ‘이것임(heccéité, thisness)’이다. 보편성이나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감각의 지평에 놓인 그 무엇이다.[1] 문형조가 현재 감지하는 것은 바로 ‘이것임’이다.


충실한 재현을 넘어섬

세계를 가장 충실히 재현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진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세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 언술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사진은 미분화된 비형상의 세계에서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을 분절해 재현한다. 이러한 세계의 분절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말한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로, 시간과 공간, 인과율을 통해 세계가 인간의 주관에 의해 개개의 형상으로 드러나게 하는 원리다. 목소리가 분절되어야 말(언어)이 되는 것처럼, 세계는 분절(분화)되었을 때 그 형상이 드러난다. 이 분절의 시공간은 맥락과 내러티브가 선형적으로 존재하는 제한된(블록화된) 시공간이다. 사진은 이러한 개별화된 시공간을 재현한다.

문형조는 처음에 사진에서 매력을 느꼈다. 대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이 가진 맥락과 내러티브를 번역하고 시각적 충격이 드러나도록 조율하여 촬영하는것이 대상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재현을 위해 오랫동안 기술적 측면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충실한 재현’에 관해 의구심이 들었고, 이렇게 촬영된 사진을 “‘좋은 사진 이미지다’, ‘완벽한 한 장의 사진 작품이다’라고 주장하기가 싫어졌다.”(작가와 인터뷰, 이하 인터뷰) 사실 재현(representation)은 존재나 사건의 핵심(순수한 형상)을 포착하여 다시(re) 현존하게 하는 일(presentation)로, 재현의 의미와 성격에 따라 ‘충실도’나 ‘완결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좋은 사진’, ‘완벽한사진’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다. 이 유동하는 ‘충실한 재현’이라는 최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이가 비슷한 기술을 연마하고 비슷하게 촬영 장비를 세팅하고 시공간을 제어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작업 방식을 억압하고 표현을 제약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사진의 이러한 특성에서 어떤 한계를 경험했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감각에 의지해 비교적 자유롭게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하고 조합하는 회화나 조각의 특성을 흡수하는 것을 택한 듯 보인다.

이러한 전환은 초기에 물리적 대상들을 감각적으로 잘라 붙여 스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촬영을 위해 시공간을 세팅하는 기존의 물리적 방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스캔된 질감이 저는 시각적으로 좋더라고요. 제가 보고 있는 그런 화면과 비슷했으니까.”[인터뷰]) 하지만 작가는 어느 순간 포토샵을 주요하게 사용하면서 비물리적 방식으로 작업 방향을 완전히 전환한다. 이때부터 온라인과 디지털기술을 활용해 이미지(스톡 사진, 스크린샷, 스캔 이미지, 마우스 드로잉)를 수집하고, 그 이미지들을 각각의 레이어로 배치하고 조합하는 방식(포토샵 효과)으로 작업의 틀을 구축한다. 더불어 그래픽 디자인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과 효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미지의 조합방식에 활용한다. 그는 촬영을 위해 시공간을찾고 조율하는 물리적 방식(충실한 재현)을 벗어나, 디지털 이미지를 비물리적으로 자유롭게 조합하고 드로잉이나 텍스트를 결합함으로써 생경한 감각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이것임’의 형성

이러한 문형조의 작업 전환은 세 가지 주요한 변화를 보인다. 바로 ‘주체의 전환’과 ‘비선형적 구조의 형성’, ‘사진의 (미)탈피’다. ‘주체의 전환’은 충실한 재현의 대상이 지녔던 주도권을 감각(신체)이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두에 말했듯이, 충실한 재현은 대상을 주체로 제한된 구도를 조성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벗어나 “환경에 ‘끼어드는 무엇’”에 집중함으로써 감각을 지닌 예술가 본인이 주체로 온전히 서게 된다. 이로써 멀리 떨어진 저것됨이나 그것됨이 아니라, 작가의 감각이 감지한 이미지의 조합인 ‘이것임’이 생성된다.

‘이것임’은 감각에 의한 조합이기에 비선형적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는 『천 개의 고원』(‘어느 <이것임>의 회상’)에서 ‘이것임’이 한정하는 형식이나 규정된 실체와 주체, 소유관계나 수행하는 기능에 의한 규정이 아니라, 물질적 요소의 집합과 변용태들의 집합이며, 그 안에는 변용태와 국지적 운동, 미분적인 속도만 존재한다고 말한다.[2] 즉 한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변용, 운동, 속도가 존재하는 물질적 요소의 집합이 ‘이것임’이다. 여기에는 맥락이나 내러티브라는 선형성보다는 변용, 운동, 속도라는 비선형성이 전체를 장악한다. 재현에서 감각으로 전환한 문형조의 작업은 의미보다 선행하는 이미지로 구성된다. 루카치(Lukács György)는 “의미는 언제나 이미지 속에 감싸져 있”다고 말했다.[3] 의미작용은 거기에 알맞은 이미지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 이전에 이미지가 먼저이고, 단지 이미지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의미가 도입될 뿐이다. 따라서 변용, 운동, 속도 등 감각적 특성으로 감지된 이미지(‘끼어드는 무엇’)의 조합은 의미 없는, 의미 이전의 ‘그 무엇’(‘이것임’)이다. (물론 사후적으로 이미지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조합에서 의미를 발굴해낼 수 있다.) 작가는 “이미지들이 어떤 연관관계가 없는데, 집 주변의 풍경들을 가져와 제 방 안에 있는 것들[이미지]과 섞어서 의미 없이 약간 색 조합을 고려하면서 만들었다.”(인터뷰, 강조는 인용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작업이 돌발적이고 어긋나고 규정할 수 없는 추상적인 효과를 지닌 이미지 작업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의미보다 앞서 존재하는 이미지와 색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의미에 선행한 감각 이미지들의 조합은 결코 선형적일수 없다. 따라서 의미로 규정된 명칭으로 부를 수 없는 비선형적인 ‘이것임’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임’은 결국 ‘사진의 탈피’를 불러온다. 이미지(image)는 시각적 세계를 재현하는 사진 뿐만 아니라, 감정이 들어있는 선, 디지털 프로그램이 생산한 가상 이미지, 정보를 기호화한 텍스트 등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심상(心象)처럼 사고 속에 무형으로 존재하는 형상까지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것임’은 사진의 범주를 탈피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감각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형조의 작업을 사진의 탈피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작가가 여전히 부분적으로 ‘사진가’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 이미지의 주체는 작가로, 사후적이기는 하지만 의미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작가의 상상력(관념, 의미)이다. 현상적으로는 작업이 사진을 탈피했을지라도 작가의 의식이 감각 이미지를 사진의 범주에 묶어 놓는다면, 그의 작업은 어떤 측면에서 여전히 사진일 수밖에 없다. 감각(이미지)이 이성(관념, 의미)에 선행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둘로 나눌 수 없는 한 명의 작가 내부에서 공존하기 때문이다.


수집, 소유, 인터페이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는 세계에서 온다. 그리고 경험은 세계를 구축한다. 경험의 축적은 세계를 넓히고, 세계가 넓어질수록 잠재된 이미지의 볼륨은 두꺼워진다. 여러 곳을 가거나 여러 사람을 만난 사진가에게 촬영할 수 있는 시공간이 많아지는 것은 경험이 그만큼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충실한 재현을 벗어난 문형조에게 경험 축적의 시공간은 온라인 디지털 세계다. “제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스마트폰에 있는 이미지나, 웹에 있는 이미지, 아니면 사람들이 올리는 SNS 이미지다.”(인터뷰) 그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비물질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고, 수집된 이미지를 분류하여 아카이빙하기도했다. 그는 이미지 수집/저장/아카이빙을 통해 경험을 축적했다. 디지털 세계를 탐색하고 그곳에 있는이미지를 수집한 경험은 작가에게 감각 이미지를 조합한 ‘이것임’을 생성하도록 이끄는 동력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의 수집(경험)이 없었다면, 문형조의 감각 이미지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형상이 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디지털 이미지의 수집/저장, 혹은 아카이빙을 자본주의적 관념과 연결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물질적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이미지 저장을 소유처럼 생각했고,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가져와 작업하는 것을 “훔치는 것”이라는 불편한 표현을 썼다. (“사진을 훔치기 싫어서” 이미지를 따라 자신만의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드로잉 방식은 현재 작가의 표현법 중 하나로 안착했다.) 또한, 그는 주제별로 아카이브 되어 있는 스톡 사진을 많이 가져오면서도,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미지는 자본 증폭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비판적 시각을 내비쳤다. (그는 매끈한 이미지의 자본주의적 역할이 싫어 일부러 매끈하지 않은 반대되는 이미지들의 조합을 만들고 있다.) 그의 사고는 자본주의적 관념을 경계하지만, 그의 수집/저장 방식은 자본주의적 성향이 짙다.

이러한 문형조의 태도는 디지털 이미지가 단순히 비물질적인 데이터나 감각만을 자극하는 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작가가 자본주의적 관념과 연결했듯이, 디지털 이미지는 경제·사회적 관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접속 장치)가 되었다. 그는 SNS와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이미지를 빨아들이는 구조”를 창안했다고 말한다(인터뷰). 작가는 하나의 경제·사회적 인터페이스가 된 이미지를 온라인 플랫폼이 전시와 공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더 많이 접속하게 하고 더 많은 이미지를 업로드하게 하며 ‘이미지를 흡수하는 구조’가 됐다고 본다. 이러한 구조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경제·사회적 가치로 얼룩진 채 자본주의적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몸짓으로 전락한다. 문형조는 이미지를 자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예술이 뭐가 될 수 있을까?

문형조가 “항상 염두에 뒀던 것은 ‘예술이 뭐가 될 수 있을까?’”였다(인터뷰). 그의 실험은 예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관한 답할 수 없는 질문과 함께한다. 그에게 예술은 한때 충실한 재현이 되어야 했고, 지금은 추상적인 관념을 희미하게라도 내보이는 어떤 것이 되길 희망한다. 예술의 순수한 형태로서 ‘이것임’은 사후적으로 의미를 창안함으로써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형조의 예술은 종국에 무엇이 될까? 그의 작업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1] 질들뢰즈·펠릭스가타리, 『천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새물결,2001, p.498.

[2] “하나의 몸체는 이 몸체를 한정하는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규정된 실체와 주체로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며, 또이 몸체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이나 몸체가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고른 판 위에서 하나의 몸체는 오직 경도와 위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말하자면, 특정한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아래에서 몸체에 속하는 물질적요소들의 집합(경도)과 특정한 권력, 또는 역량의 정도아래에서 몸체가 행사할 수 있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집합(위도)에의해. 오직 변용태들과 국지적운동들, 그리고 미분적인 속도들만 있을 뿐.” : 위의 책, p.498.

[3] 게오르크 루카치, 『영혼과 형식』,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8.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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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gjo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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