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동력이 멈춘바닥을 기어다니는 이미지 공간에서
문형조 개인전 <공세종말점>

콘노 유키(미술비평)


이미지와 정보량: 산출(産出)이냐 산출(算出)이냐
―의미의 방향성에 따른 에너지 생산

정보량이 많은 사진이 있다. 예컨대 교통사고 현장조사 장면 앞에서 재봉틀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신사복 차림의 인물이 한 컷 안에 담겨 있는 이미지가 그렇다. 보는 사람은 각기 인과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는 장면을 보고서는 정보량이 많다고 판단한다. 제한된 컷 안에서 교통사고가 난 장소에-신사복을 입은 청년이-재봉틀을 들고 있는 모습은 서로 연결될 개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보량이 많은 사진에서 사건은 개별적이지만 한데 어우러져 더 이상한 공간을 조성한다.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모음과 배치는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에 차 있으며, 우리는 그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에 의미를 계속 추궁하는 동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동력은 보는 사람을 의미의 한복판으로 빠져들게끔 손짓하면서 동시에 의미를 개연성으로 묶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정보량이 많은 사진에서 그 의미의 동력―그러나 궁극적으로 의미가 성사되기 어려운 ‘헛돌아가는’ 동력―은 개별 사건의 이미지끼리 맺는 관계를 무/의미를 향해 열어놓는다. 즉 이런 사진에서 이미지의 배치는 뜻을 산출(産出)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의미를 향한다. 앞서 들었던 예시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신상 재봉틀 광고를 야외에서 찍기로 하였다. 촬영 장소를 미리 정했고 배우도 불렀는데 아까 찍으려니까 사고가 나 있었다. 워밍업 삼아 우리는 배우에게 재봉틀을 들고 스냅샷 찍듯이 사진을 찍었다. 뒤에서 경찰 조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이미지를 보고 내린 그나마 이상적인 해석이겠지만, 이미지와 해석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여전히 있다. “왜 하필 야외에서 광고를 찍기로 하였을까? 굳이 사고가 난 장면 앞에서 돌발적으로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해석은 여전히 결과 지향적이다―1) 이미지라는 결과에 온전히 귀속하듯이. 

뿐만 아니라 2) 그 해석의 결과중심적인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해석은 여전히 결과 지향적이다. 앞서 본 정보량이 많은 사진과 다른 이 이미지는 파편적으로 나타나는 광고 화면의 형식에 해당된다. 온라인 화면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팝업 광고들, 자동으로 추천되는 “이 사진을 보면 당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사진 모음, 그리고 아이패드 당첨 같은 악성 광고들. 이 이미지들은 욕망과 불안으로 보는 사람을 몰아세우는데, 이때 욕망과 불안은 꽤나 구체적이다. 양감(볼륨)으로 전달하고 무의미의 바닥에서 의미를 불러내는―그러나 끝끝내 성사되지 않음을 반복하는 것과 달리, 이 이미지들에서 욕망과 불안은 의미와 방향이 이미 주어져 있다. 웹사이트나 SNS 공간에 스며든 광고들, 예컨대 탈모나 영어 능력 향상을 기약하는 광고가 나타났네 하면 바로 옆에 추천 광고가 뜨는 것처럼, 이 이미지들은 어디서든 자기주장을 내놓기 시작한다. 정보량이 많은 사진이 해석을 통해서 개별 이미지(들)끼리 무의미의 게임을 벌인다면, 광고 화면은 한 화면 속에 산발적으로, 그러나 주장을 일방(향)적으로 주장을 내놓는다. 동시다발적으로―그러나 다발처럼 묶어놓을 수 없는 채―나타난 광고 이미지들은 무/의미를 산출(産出)하는 대신 소비를 산출(算出)한다. 

불과 100년 전 초현실주의자의 작품에서 (주로 콜라쥬의 형식으로) 추동된 욕망의 공간은 이제 소비주의적 경제로 넘어갔다. 연관단어, 검색결과, 그리고 팔로잉과 언-팔로잉의 관계망에서 이미지의 배치는 이미 방향 지어진 욕망으로서 틈틈이 나타난다. 주인의 욕망 혹은 헤아릴 수 없는 대상화된 힘이 아닌, 방향이 조정된 욕망의 구체적인 결과로 광고 이미지는 나타난다. 이미지와 정보량의 관계는 의미 규정된 소비주의와 함의로 빠져들게 하는 사이에서 요동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배치 사이에서 대상이 뚜렷한 욕심과 의혹―어떨 땐 개그로 취급되는 소비의 반복 운동일 뿐이다. 정보량 많은 사진의 가능성, 즉 의미를 산출하는, 무/의미를 욕망하는 해석 가능성은 곧 추천 광고로 뜨는 ‘당신은 이 사진을 실제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나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의 이미지 모음처럼 개그나 유머로 소비된다. 


차가운 이미지: 열리거나 닫히는 레이어가 궁극적으로 향하(지 못하)는 영도(零度)의 바닥

그 이미지는 앞서 언급한 정보량이 많은 사진과 광고 이미지의 성격을 띤 것처럼 보인다. 이번 개인전 <공세종말점>의 출품작에서 작가가 구성한 화면은 각기 다른 출처에서 가져온 것처럼 소재가 복수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광고처럼 물건이나 인물의 잘 잡힌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복수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말은, 작가가 다룬 소재가 여러 개 있다는 의미는 물론, 그 소재들이 각각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공간 내부로 들어왔는데 서로 개연성 없이 배열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정보량이 많은 사진이나 이미지 광고가 넘치는 동시대적 감성―섣불리 말하려면 ‘인터넷적인’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레이어 특화된’―으로 부르면 결국 순환고리에 휘말려 들어가버린다. 무엇보다 작가의 말에 앞서, 그가 만드는 이미지 자체가 이런 순환고리에 휘말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작가가 만드는 일련의 이미지는 ‘인터넷적인’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유사 현실 또는 픽션’ ‘레이어 특화된’ 것으로 충분히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만드는 이미지의 핵심적인 부분은 우리가 볼 때 느끼는 차가움이다.  

그가 다루는 이미지 소재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스마트폰이나 동영상 플랫폼, 이모지가 있다. 이 소재들은 다른 소재(예를 들어 바다, 인물, 책에 실린 도판 등)와 함께 (스톡) 사진+드로잉+스크린샷+스캔 이미지+포토샵 효과+배치하는 제작 과정을 거쳐 레이어화된 이미지로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결코 화목하거나 따뜻해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은 이미지의 뜻을 더이상 전개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이미지에서 방향 지어진 주장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살펴본 정보량 많은 사진과 광고 화면이 의미로 열려 있거나 욕망과 의미를 방향 짓는다면, 그의 이미지는 의미가 닳아 바닥에 닿아버린 결과이다. 작품의 차가움은 그 바닥에서 나온 결과, 즉 바닥에서 의미가 방향을 갖든 열려 있든 간에 활성화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이는 단순한 ‘칠 아웃(chill out)’이 아니다. 칠 아웃의 이름으로 ‘무드’/유행으로서 소환된 여가 또는 여유의 틈은 순간적으로 끼어드는 광고판―유튜브 영상 중에, 타임라인 중 프로모션 트윗처럼 삶에 침투한다. 문형조가 만드는 차가운 이미지는 에너지를 받아 한 방향으로 솟구치는 오늘날의 이미지 생태계 속에 빠져들거나, 다양한 의미로 열려 있는 가능성이 결국 개그나 유머로 소비되어버리는 맥락의 동력을 보여주는 대신 그 밑바닥인 영도(零度)를 기어다닌다. 

개별 이미지를 보면 구도가 잘 잡혀 있고 정돈되어 있고, 어떤 경우에 문구가 들어가는 점에서 문형조의 작품은 광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광고의 성격을 빌려 구체적이고 방향 지어진 의미나 욕망을 거부한다. 흔히 광고에서 이미지 소재를 다룰 때 의미 전달에 이상적인 컷과 문구, 그리고 배치가 선택된다. 예를 들어 치아 교정의 광고에서 우리는 아픈 표정을 짓는 인물 대신 환히 웃는 인물의 사진을 쓰며, 이에 꼭 어울리는 문구가 쓰인다. 이상적인 의미를 향한 소재들의 동원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이미지 공간 안에 하나의 의미를 방향 짓는다. 그런데 이런 동원 방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보량 많은 사진의 막다른 길이기도 하다. 광고처럼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과 이미지를 해석하고 다루는 일은 ‘소비’라는 순환고리에서 활기를 얻는다―소비를 위한 이미지나 이미지를 대상으로 한 소비. 

문형조의 작품에서 소비의 활기는 한 화면 안에서 개별 이미지를 다룰 때에도 소진된다. 가장 적절한 것들의 이미지―표정, 각도, 화질―들이 하나의 맥락에서 추출되어 더 확고한 맥락으로 심어지는 것과 달리, 그가 추출한 이미지는 섬네일처럼 단독적으로 하이라이트가 되지도 않고 화면 전체를 의미로 단단히 묶어놓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은 원본 이미지와 추출된 후의 이미지 양자 모두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미지를 소재 삼아 다룰 때, 그의 작품은 이미지의 원래 맥락에도, 해석되거나 편입된 맥락에도 마음을―뜻/의지를, 열망을―움직이지 않는다. 그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설령 의미가 ‘닳아버렸다’ 혹은 ‘고갈’되었다 할 수 있을지라도 그의 작품은 (새로 해석되거나 기존의 맥락을 더 강력히 주장하는) 의미를 더이상 채우기 힘든 곳으로 삼는다. 작업의 과정이자 동시에 결과인 레이어는 정보량 많은 사진처럼 의미를 향해 열려 있거나 광고 이미지처럼 의미를 닫히는=좁히는 성격 둘 다 거부한다. 작품에 펼쳐진 장면은 의미를 강화하는 스토리 즉 배경도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소재 즉 대상도 아닌, 의미가 소진된 바닥에 침잠된 ‘것들’이다. 


물이 더이상 채워지지 않는, 놀고 있는 토지로

오늘날의 이미지 생태계에서 놀이는 여가와 휴식이면서 동시에 광고처럼 욕망의 방향을 조정하고 또 조정된 결과로서 나타난다. SNS에 자발적으로 업로드하고 문제를 지적받는 바보짓, 릴즈의 춤이나 유튜브의 먹방을 비롯한 이미지는 여가와 휴식이나 놀이는 즐기는 일에서 시작되더라도 (그만큼 또 모두가 갈구하는 것이기에) 사람을 끌어당기고 때로는 선동한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그의 작품은 “놀고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들은 차갑고 의미가 마르고 닳은 것처럼 추출되어 함께, 그러나 어떤 인연 없이 같이 나열된다. 그렇다고 놀고 있지 않은 이미지라고도 하기 어렵다. 오히려 욕망으로 주어진 방향 없이 바닥을 기어다니는 점에서 그의 작품 속 이미지들, 그리고 작품은 진지한 놀이를 (무목적으로) 벌이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한 어조로, 그렇다고 ‘매우 진지’한 말투 대신 이렇게 묘사할 수 있겠다. “아주 그냥 놀고 있네”. 

오늘날 이미지는 아전인수(我引水)해서, 심지어 아전인수 당해도 충족된다. 내게 좋은 맥락을 끌어들이거나 다른 맥락으로 넘어가 의미를 부여받을 때, 이미지는 힘을 얻고 활기차고 빛을 낸다. 그와 달리 문형조의 작품은 양쪽에 놓인―한쪽에 열려 있는, 한쪽에 닫힌 맥락을 향하지 않는다. 그곳은 의미를 향한 에너지가 바닥까지 닳아버린 곳, 그런 의미에서 놀고 있는, 다시 말해 황폐해진 토지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희망이나 열망으로 가득 찬/채워질 곳이 아닌, 더이상 ‘어떤’ 놀이를 벌이거나 의미에 목말라 하지 않는 곳이다. ‘매우 진지한’ 말투의 어조는 빈틈을 채우거나 열어놓은 대신 바닥에 닿는다-말라 닳는다. 어조는 더이상 조율을 갖지 않는다. 이제 드디어 ‘공세종말점’에 도달―목표 지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힘을 낼 여력이 없어진 상태―했다. 문형조의 작품에서 공세종말점은 의미뿐만 아니라 맥락 또한 소진된 영도의 바닥이다.

© 2022 
Hyungjo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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